학술활동

1차 사진세미나 <여성사진의 이면사, 여성사진사 기술은 가능한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kowpa 작성일06-06-27 18:10 조회2,787회 댓글0건

본문

2003 "한국사진에서의 여성"에 관한 워크샵


1차 사진세미나 <여성사진의 이면사, 여성사진사 기술은 가능한가>

일시:2003년 11월28일(금:오후 3시/서울여성플라자)
주제: 한국사진사 - 여성사진의 이면사, 여성사진사 기술은 가능한가
강사: 최인진(한국사진사연구소 소장)



<서문>
여성 계층과 사진, 두 분야를 관련시켜 기술할 수 있는 한국여성사진 기술은 가능할까. 이러한 부분을 생각하면서, 사진 분야에는 여성이, 여성에게는 사진이 어떠한 위치에서 의미를 가지고 공존했을까, 하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사진이 이 땅에 수용되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어떤 역할이 되었으며, 자유를 제약하고 기회를 박탈했던 정통적인 관습을 개선해 나가는데, 어떤 방법으로 사진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었는지. 또 가족이란 제도는 우리 사회의 근원이었지만, 오래 동안 남성들이 중심이 된 사회를 형성해오다가 사진이 수용되면서 부부가 동등한 자리에서 가족들을 거리고 사진을 찍고, 그것을 현시할 수 있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러한 재도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사진 수용의 초기에 많은 여성들은, 사진을 이해하지 못한 형편에서 사진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개방할 수 있었던 특수 계층의 여성들, 기생들의 행위는 여성의 지위 향상에 얼마큼 도움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와는 다른 얘기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일제에 피검되어 자신의 얼굴이 노출될 뿐만 아니라 사법적인 대상으로 사진이 찍혀지고, 인류학적인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사진의 인도적인 행위에 대해, 여성들은 어떠한 의사 표시나 생각들을 가졌을까. 그리고, 여성들이 처한 인습을 타계하기 위해, 물론 상업적이긴 하지만, 남성사진사들이 사진관을 장악하고 있을 때, 처음 등장한 여성사진사들이 여성들을 사진관으로 끌어내어 사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는데, 이러한 역할이 여성들이 처한 사회적 분위기와 여성의 삶에 도움을 주었는지 등 등, 여성과 사진은 어떤 관계를 맺고, 맺어 왔을까 하는 것들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이러한 여러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진으로 밖에 풀어갈 수 없는 처지여서, 여성의 지위와 권위 등을 쟁취해 나가는 문제 보다는 여성들과 사진이 어떻게 만나게 되고 사진을 어떻게 자유스럽게 향유하고 생활의 일부로 수용하게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남성들이 지배하던 사진계에 여성들이 직업인으로, 사진가로, 아마추어 등으로 활동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시도가 궁극적으로는 한국사진에서 여성사진의 역사라는 분야의 기술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시론으로 준비되었으나, 너 무 방대한 작업이어서 여기에서는 그 일부만을 소개하는데서 마무리 했다.


< 서양 여행객의 시각을 통해 본 조선의 여성들>
사진이 수용되지 않았던 조선시대는 -물론 사진 수용 이후에도 오래 동안 그랬지만- 유교 사상의 강력한 영향으로, 이것이 모든 생활양식에 지도 이념화 되어, 여성들의 지위와 권위, 통념상의 사회적 분위기, 삶의 조건 등을 고려하지 않던 시대였다. 여성의 활동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속에 미약한 예속물일 뿐이었다. 여성은 일생을 두고 아무런 법적 보장이나 사회적 지지도 얻지 못하고 이른 바 칠거지악(七去之惡) 삼종지도(三從之道), 부창부수(夫唱婦隨), 여필종부(女必從夫) 등의 굴레에 얽혀 자주적인 주도권을 갖지 못했다. 이러한 남성 중심의 시대에, 여성들은 현대사회의 기본원칙인 개인 책임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남편이 잘못을 저질러 처형되거나 남편이나 자식이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부녀자의 운명도 좌우될 정도였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여성관에 대해, 1884년 미국의 천문학자로, 견미사절단 파견 때 사신들과 동행해 미국을 시찰하고 함께 귀국해 겨울 한 철을 한국에 머물렀던 퍼시벌 로웰은, <아름다운 나라 조선>이라는 그의 책에서 제도화된 사회 통념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록했다. 다음은 그의 글에 나타난 당시대의 여성들이 처한 여러 형편들을 기록한 것들이다.
조선 여성의 생애를 잠깐 엿보기로 하자. 출생에서 일곱 살까지는 그래도 이후 사회에서 생매장당할 숱한 제한들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전성기 동안은 어떤 다른 피조물 못지않게 멋대로 행동할 수 있으며 성에 대한 구별도 없다. 그러나 일곱 살이 되면 여성은 외부세계와 단절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평생을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살게 된다. 이 나이에 이르면 남아와 여아는 서로 별거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세상은 남자아이들의 것이 되고, 여자 아이들의 세계는 내실의 좁은 공간으로 제한된다. 미혼인 여성은 아버지나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남자도 만날 수 없다. 이는 마치 세속적 수도원에 갇힌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벗어난 유일한 방법은 결혼이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줄곧 그와 비슷한 제도 속에서 생활한다. 왜냐하면 출가 후에도 남편과 시댁 식구들만이 그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 여성은 단순히 남편에게는 그저 아내요 자식들에게는 어머니일 뿐이다. 남편은 그녀의 생명을 빼앗거나 아주 잔인하게 학대하지는 못하지만,어쨌든 아내에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가진다. 그녀의 행동반경은 결혼하기 전과 다름없이 주로 집안이며 사회와도 여전히 차단된다. 어쩌다 불가피하게 밖에 나갈 때는 베일로 얼굴을 감싸거나 사방이 가려진 가마를 타야한다. 남편을 제외하고는 어떤 남자도 그녀를 볼 수 없다. 일생동안 절친하게 지내는 친구라 할지라도 막상 그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더 심하게는 그에게 아내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내기 십상인 것이다.(…) 여성의 삶이 이렇기 때문에 서울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여성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가마를 타고 다녀서 전혀 볼 수 없는여성, 걸어가는 옷 뭉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여성 그리고 생계를 위해 일하느라고 남의 눈에 노출된 여성들이다. 그러나 비록 어쩔 수 없이 노출된 마지막 부류의 여성들도 마음만은 앞선 두 계층과 다름없이 남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처럼 여성들이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 하는 차이는 부유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부유한 집안의 여성들은 사방이 가려진 가마를 타고 다니는데, 하녀가 뒤나 옆에 따라가면서 시중을 든다. 그보다 덜 부유한 계층의 여성들은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걷는다. 흔히 길가의 우물에서 물을 긷거나 온갖 종류의 잡일을 하는 하층 계급 여자들은 부득이 맨머리로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물결치듯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이 그녀들에게 머무는 법은 결코 없다. 여자들을 훑어본다든가 그녀들에게 주의를 쏟는 행동은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들 중 어떤 한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는 것은 큰 모욕을 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정신이상자로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서양인이 기록한 여성들의 지위라든가 인격, 생활 요건 등에 대해, 정확성 여부를 판단하려는 의도에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만일 이러한 사실들이 당시대의 통념이었다면, 아마 그보다도 더 여성 비하적인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사진가들은 여성들을 상대로 사진을 어떻게 촬영했을까. 이 말을 바꾸어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를 카메라 앞에 표출해 사진을 촬영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여성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처한 이러한 사회제도의 통념을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랄까, 개선을 들고 나온 예는 쉽게 찾아 볼 수 없고, 역시 이러한 문제들까지 남성들의 주도에 의해 제도가 만들어지고, 사회의 통념을 변경시키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여성 자신들도 사진에 대해 많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성 사진 촬영의 확장 -서양인의 카메라에 찍힌 최초의 여성사진>
사회적으로 내외법에 의해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고, 여기에 사회 전반에 만연된 관습적인 의식이 팽배한 이러한 시대였지만, 사진의 매력은 여성들 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여성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혀지고, 이러한 사진들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 여행객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아마 이들이 사진 수용 초기에 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최초의 여성들 모습이 아니었을까. 카메라를 메고 개항 이후 비교적 초기에 한국에 왔던 서양인들 중에서 이러한 여러 시도들을 감행하였는데,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들의 사진 활동에 여성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들을 남기게 되었다. 1883년 겨울 한국에 왔던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1)은 아마 여성 사진 촬영의 선구자로 추측되는데, 여러 사람들 중에 여성이 찍혀진, 혹은 무리를 이룬 형태에서 찍혀진 여성 모습이 아니라, 여성을 목표로, 여성을 촬영하기 위한 대전제 아래서 촬영한 여성 사진 촬영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이다. 모델이 된 여인은 사진 설명에도 있는 것처럼 가희, 즉 기생이다. 절을 구경하고 싶다는 퍼시버 로웰의 청을 이뤄주기 위해, 주위 친구들은 소풍 장소로 유명한 서울 근교의 화계사를 선정하고, 이에 악사와 일본인 요리사, 그리고 기생들이 함께 동행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교외 나들이 중에 귀중한 여성 사진을 촬영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로웰은 이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 그의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보인다.
출발하는 날 아침은 그야말로 모든 집안사람과 하인들이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소란을 피워댔다. 탈것들이 여기저기 난잡하게 흩어진 가운데 별로 할 일도 없는 인부와 수레꾼들이 서성거리고 있어 주위는 더 혼잡했다. 분열된 패잔 부대와 같은 동요가 있은 후 마침내 커다란 짐 보따리가 수레에 올려지면서 인부들이 떠났다. 선발대가 출발 한 뒤 가희들이 도착했다. 집 안은 온통 가희들의 물결이었다. 보통 때 여자들이 없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가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함께 식사를 했다. 이때 공사관의 한 친구가 나타나 그토록 잡다한 집단에 탈것을 한 대 보탰다. (…) 오후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우리는 삼각산 입구에 도착했다. 숲으로 들어서자 마치 겨울 숲의 엄숙한 침묵에 압도당한 듯 갑자기 모두가 조용해졌다. 낙엽이 진 나무들은 우중충한 갈색이었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길 옆에 새하얗게 쌓여 있었다. 숲은 구슬픈 침묵과 적막함으로 아름다운 분위기를 더했다. 단지 우리 일행의 한층 낮아진 목소리와 발소리만이 그곳에 깃들인 적막을 깨뜨릴 뿐이었다.
정확하게 촬영 장소라든가, 촬영 경위 등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사진에 나타난 분위기와 매우 흡사할 뿐 아니라, 사진의 모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생에 대해 아주 자세한 표현을 남기고 있다. 심지어 나는 가희들과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그녀들 중 하나는 내게 특히 친절했다. 호랑이 같은 이방인을 처음부터 돌봐 준 유일한 여자였다. '향기로운 붓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지금 내 옆에 앉아 서투른 일본말로 그러나 가슴에 와 닿는 감동적인 음성으로 부드럽게 속삭이고 있다. 그녀의 애교는 승려들의 표정과 함께 기묘하게 두드러져 보였다. 그녀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은비녀만큼이나 소박하게 빗어 넘겨 쪽을 찐 그녀의 새까만 머리를 훑어보던 내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 멈추었다. 그녀의 미소로 인해 한동안 나는 내가 외국인이며 내 고향은 수만 마일 떨어진 곳이란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로웰이 찍은 여러 사진 중에 여성사진은 단 한 장 밖에 없지만, 이 사진은 그의 책에 <길 위의 가희>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외길이 난 숲 속 길에서 성장을 한 여성이 마상에 앉아 있는 은밀한 분위기처럼 연출된, 전혀 사람의 이목이 배제된 상태에서 촬영된 모습이었다.


< 최초로 북한 지방을 촬영한 켐벨의 여성사진 >
외국인들의 한국 진출 초기에는 많은 사진들이 촬영되어 여러 책들에 소개되었으나, 그럼에도 여성들만의 사진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영국영사관의 부영사였던 켐벨(Campbell)은 1889년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당나귀 등에 싣고 압록강과 백두산, 금강산 등 북한 내륙지방을 여행하면서 25장의 사진 기록을 남겼다. 북한 사진을 기록한 최초의 외교관이었던 켐벨의 눈에 비친 북한의 여러 모습 속에도 여성만을 촬영한 사진은 없지만, 관리들과 함께 기념사진처럼 찍은 모습 속에서 북한 여성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10월 함흥 관아에 도착한 켐벨은 함흥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두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 중의 하나는 함흥사또와 관기로 보이는 아낙네들, 그리고 관리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형태의 것이고, 또 하나는 선화당에서 촬영한 것으로,사또의 양옆에 관청의 권위를 나타내는 관풍찰속 승류선화(觀風察俗 承流宣化)라는 주련이 걸린 사이에 기물들을 설치하여 가운데 사또가 앉아있고, 그 옆에는 사또를 받드는 두 여성이 보위하고 있는 장면을 연출한 사진이다. 여염집 여성들이 사진 촬영에 응하지 않던 시대에, 아마 지방 관찰사의 권위에 눌려 할 수 없이 사진 촬영에 응했던지, 모두 긴장된 표정을 짓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이 나타난 사진이 되었다. 켐벨의 북한 촬영기행기에는 한국 사회 전반에 자리잡고 있는 여성 비하적인 시각을 그대로 믿고 있던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일행을 이끌어 가는 총책이 눈에 보이지 않자 그 총책의 부인이 나서서 그의 일을 대신하여 우리 일행을 인도하였는데, 중년의 아름답게 생긴 그 부인은 남자들을 이리저리 얼마나 놀라운 솜씨로 명령하고 움직였는지 나는 연신 탄성을 질렀다. 그 부인은 빗속에 떠나지 않으려는 마부들과 일행을 막걸리를 먹여 세시간만에 그들이 일어서서 다시 길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애교 있는 몸짓과 때로는 서슬이 퍼런 목소리로 남자들한테 호통을 쳤는데, 한국에서 여성의 영향력이나 여성의 지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존경 받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는 남자들은 앉아서 담뱃대에 담배나 쏟아 부으면서 끝없이 돈즉 노임에 관해서 싸움질만 할 때 그 부인이 앞장서서 긍정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불만을 소화시키며 일행을 조화롭게 인도해 나가는 모습에 아주 감명을 받았으며 앞으로는 그녀에게 무조건 모든 것을 맡길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일본인 타케이치가 촬영한 여성사진>
일본인으로는 비교적 초기에 한국의 여러 모습을 촬영해, 사후에 사진집으로 출판했던 주한 일본 공사관직원 하야시 타케이치(林武一)의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 에 수록된 사진에 비친 여성들의 모습에서, 그에게는 물론 시기적으로 앞에 언급한 여행가들보다 시대적인 간격 때문이지만, 1888년 무렵에 여염집 부인들의 모습도 촬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 같다. 주한일본공사관원으로 서울에 근무하고 있던 하야시 타케이치라는 일본인 사진가가 촬영한 사진들 중에 <부인>, <장옷 쓴 부인>, <교여를 타고 가는 부인>, <관기>, <관기(여러 명이 촬영한 것)> 등이 있는데, 이러한 사진들은 지금까지 기생이나,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던 시골 부인들에 한정되었던 여성들 모습에, 계층은 구별되어있지 않지만 여염집 여성들 사진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여성 사진은 사진관 내에서 촬영한 것으로 기념사진과 같은 연출에 의해서 촬영했으며, 이 사진가가 찍은 그 외의 남성들 인물사진도 대부분 이러한 과정에서 촬영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인>이라는 사진과 <장옷 쓴 부인>이라는 사진은 사진관에서 촬영한, 평상복 차림과 외출 때 걸치는 장옷 쓴 모습을 연출한 여성상이다. 양 옆에는 단조로운 화면에 서양식의자와 화분을 놓아 분위기를 살리는 것을 잊지 않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낮은 감광도 때문에 인물사진 촬영 때 움직임을 방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게 목 받침대 사용을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야시 타케이치의 사진 중에는<교여(轎輿)>라는 제목의 장면도 있는데, 이 사진의 연출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사진 자체만으로 보면, 가마를 타고 가는 마님이 가마 창을 열어 얼굴을 촬영하는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특이한 사진도 있다. 일본인으로 초기 한국의 여러 모습을 촬영한 하야시 타케이치는 1858년 일본 명치유신 시대의 주역들이 배출된 죠주(長藩)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출생해, 명문교 메이린관(明倫館) 문학료(文學寮)의 졸업생으로, 일찍부터 수재로서 주목받았다. 1871년에 독일 학교와 1873년에는 오사카 공립 영어 학교에 들어가 수학했다. 이어 영국의 중국 함대 군의관에게 의술을 배웠으며, 영국 황손이 승선한 선박이 나가토(長門) 아카마가세키(赤間關)에 정박 때, 통역 겸 접대역을 맡기도 했다. 20대에 야마구치현의 위생 담당이 되었다가 대장성에 들어가 오사카 조폐국 경제 분석 등을 담당하다가 1883년 해군성 판임어용괘(御用掛)를 거쳐 영국에 출장, 1887년 영국 런던 영사관에 근무하면서 영국에서 새로 건조한 함정 인수 업무를 담당했다. 하야시는 영국 체류 기간동안 미국을 시찰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으며, 세계정세를 파악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사진술을 습득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1888년 30세 되던 8월에 서울에 있던 주한공사관에 부임하게 되는데, 그는 영국에서 배웠던 사진술을 활용해 카메라를 메고 한반도에 건너와 역사가 오래된 성벽, 성문, 풍속 등을 촬영했다. 사진을 1장 촬영하려면 여자의 1개월분의 급료에 해당하는 많은 돈이 들었던 당시대에 하야시는 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았던 부유한 환경에 있었다. 1892년 봄, 조선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이즈모 호(出雲丸)에 승선하여 인천항을 출항해 일본을 향해 가던 중 전라남도 소안도(所安島) 앞 바다에서 암초에 좌초, 침몰하면서 하야시도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노출 시간이 긴 대형의 카메라를 삼각 받침대에 받치고 촬영한 120장의 사진은 그가 죽은 지 7개월 후에 부인 가메코(龜子)가 망부를 그리워 해 같은 사진회 회원이고 또 일본 유명 사진가인 오가와 이쓰진(小川一眞)의 협력을 얻어『조선진경(朝鮮 眞景)』이란 이름의 사진 석판화로 된 사진첩을 출판했다.
일본사진회원이기도 했던 하야시는 노출 시간이 긴 대형의 카메라를 삼각대에 받치고, 사진의 구도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뛰어난 카메라 아이로 많은 사진들을 촬영했는데, 돈의문, 숙정문, 혜화문, 광희문, 소희문, 창의문 등 6개문을 비롯해 경복궁, 경희궁, 훈련원, 영국영사관 등 각국의 영사관 수 백 장의 사진을 남겼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체격측정 사진 >
여성 사진 시대를 연 것은 기생이라는 신분 계층에 의해서였다. 당시대의 일반 여성들이 사회 규범으로 사진과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기생들은 카메라의 매력을 일찍 체득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싶은 것은 여성들의 본능. 기생들은 내외 법에 관계없이 남성 사진사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초기 사진관의 중요한 고객이었다. 사전에는 춤, 노래, 풍류로 주연석, 기타 각종 유흥 행사에 흥을 돋구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기생은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생겼다는 기원 설과 고려 태조가 개성에 도읍을 정할 무렵, 백제의 유민을 노비로 지방 각읍에 예속 시켰는데, 그 중 미모의 여인들이 가무를 배워 예자 활동을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많은 관기가 생기고 약방기생, 상방 기생이란 별칭이 생겼다. 관기 설치의 목적은 여악과 의침(醫針)에 있었고 변군(邊郡)에서는 장사(壯士)를 위로하기 위하여, 열군(列郡)에서는 사신과 객을 접대하는 역할을 했다. 기생은 지방마다 특색이 있었는데, 안동기생의 송대학지도(誦大學之道), 관동기생의 창관동별곡(唱關東別曲), 함흥기생의 송출사표(誦出師表), 의주기생의 치마무검(馳馬舞劒), 제주기생의 주마지기(走馬之技), 평양기의 창관산육마시(唱關山戎馬詩), 영흥기생의 창용비어천가(唱龍 飛御天歌)는 유명하며 무예, 예능까지 겸비하였다. 서울과 평양에 기생학교가 있었으며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독서, 습자, 음곡, 가무, 예의 등을 교육시켰다. 일제때는 기생이 허가제였으며 기적을 둔 권번(券番)이 있었다.
동기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 기생 양성과 요정 출입을 총괄하고 화대를 받아주는 중간 역할도 했다. 기생은 노래와 춤과 교태로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직업이기 때문에 미모에도 신경을 써야할 뿐만 아니라 복장이나 방치장도 화려하게 했는데, 당시의 사진에는 이러한 일면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기생은 향락적긴 분위기 속에 남성들을 상대하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접대부로 평가 절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짜 기생들은 15세에서 20세에 기생 학교에 들어가 독서, 습자, 음곡, 가무, 예의 등을 배워 예능인으로 자격을 갖춘 여성들이었다.
국운이 쇄잔 하여가던 고종 말년, 서울의 기생사회는 친일파들의 손이 여기에도 미쳐, 다동 기생조합 광교 기생조합 등 기생조합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조선권번, 한성권번으로 바뀌고 여기에기생을 학교를 설치해 어린 기생들을 육성했는데, 교과 과목은 시, 서화와 가무와 악기, 일본어까지 교육 시켰다. 기우는 국운(國運)에도 불구하고 고종 말년의 한국에는 국경(國慶)이 빈번하여 궁중의 향연은 끊일 날이 없었고 기생의 가무 또한 성행되었다. 기생은 주로 정재(呈才)를 당하면 각처에서 모여들었는데 특히 평양 기생이 많이 올라왔다. 그런데 서울에서 업(業)을 하려는 향기(鄕妓)는 대개 무부기(無夫妓)요 서울 기생들은 포주(抱主)가 있는 유부기(有夫妓)들이 많아 서로 대치(對峙)하고 있었다.
이때 정악원의 학감 하규일는 무부기를 합하여 다동(茶洞)에 정악원 전습소 분교실(정악원전습소분교실)이란 무부기 조합을 설치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울 기생(京妓)도 조합을 설립하니 이것이 소위 유부기 조합인데 광교(廣橋)에 있었다고 광교 조합이라고도 했다. 무부기 조합의 배후는 친일파 송 병준(宋秉畯)이 지원하고 전면에는 하 규일 일파를 내세워 교도(敎導)를 담당케 하였는데 후에 다동조합이라 불렀다. 서울 기생의 광교조합이 비록 조합설치로는 선수를 빼앗겼으나 이들은 다동조합을 신분적으로 천시하였다. 그러나 다동 기생들은 원조(元朝) 계급이 무엇이냐고 반항했다. 그러나 당시 친일파 조 중응(趙重膺)의 주선으로 종래의 삼패(三牌) 무리를 모아 신창조합(新彰組合)이란 것을 만드니 삼패가 일약 일패(一牌)인 기생으로 승격하였다. 당시 일패였던 기생들은 홍산(紅傘), 삼패였던 창녀들은 청산(靑傘)을 가지는 등급이 있었는데 이때부터그 신분적 구별이 소멸되었다. 그후 조합의 수가 7, 8개씩이나 되고 일본 교방(敎坊)의 명칭을 모방하여 권번(券番)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다동조합은 조선권번(朝鮮券番), 광교조합은 한성권번(漢城券番) 등으로 개칭하였다. 권번은 각각 동기(童妓)를 육성하는 기생학교를 부설하였는데 특히 평양에 설립된 기성권번(箕城券番)의 학예부 규칙이 이 시기의 상황을 잘 설명하여 준다. 즉 교수 과목은 시조. 가곡. 검무(劍舞). 우의무(羽衣舞). 현금(玄琴). 양금(洋琴). 가야금. 한문. 시문(詩文). 서(書: 行書 楷書). 도화(圖畵: 사군자 , 영모 , 산수, 인물). 일어(日語:독본, 회화) 등이었다. 학습 기간은 3년이었지만 기능의 숙달 정도에 따라 신축성을 가진다는 단서가 있었다. 입학 연령은 8세부터 20세까지로 하였는데 학업성적이 우수하면 지필(紙筆). 잡기장(雜記帳) 또는 상의(上衣) 한 벌을 상으로 주고 풍기 문란 또는 학칙을 위배하는 자는 퇴학을 명하기도 하였다.
1900년을 전후해 조선에 나와 사진관을 개업하고 있던 일본인 사진사들은 기생을 모델로 많은 사진을 촬영했으며, 이 사진을 시중에 판매하기도 했다. 인쇄술의 발달로 사진 복제가 가능해지자 기생을 찍은 사진이 책이나 엽서에 인쇄되어 시중에 판매되기도 했다. 1895년경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스어 교사로 서울에 왔던 알레벡크가 찍은 사진들로 엽서를 만들어 판매한 적이 있는데, 그 엽서 중에는 기생들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또 어느 사진관에서는 기생들에 대한 남성들의 높은 관심에 착안해 당시로는 파격적인 등신대의 기생사진을 만들어 이것을 판매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이후 일본인들을 비롯한 유럽인 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기생은 가장 인기 있는 피사체가 되었으며 많은 사진들이 촬영되었다. 특히 기생사진은 1970년대 무렵 일본인들 사이에 한국에 기생파티를 즐기기 위한 관광이 유행했던 것처럼, 당시에도 그러한 연유에서 기생사진이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1880년대에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근무했던 이완용의 부인 사진이 그곳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된 적도 있고, 또 외국인들이 조선 여행기를 출판한 책들에도 궁녀들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으나, 사회의 관습법인 내외법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스럽게 남성들 앞에서 포즈를 취할 수 있는 계층은 기생들이었다. 기생들의 사진은 여러 형태로 촬영되었는데, 대부분의 사진들 속에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것은 몸 전체가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사진들 중에 상반신만을 촬영하거나 얼굴만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시의 사회에 믿음처럼 퍼져 있던 미신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직업여성으로 관습에 얽매임은 없었으나,신체의 일부를 토막낸 것처럼 상반신이나 칠부신상으로 사진을 찍기까지는 더 많은 시일이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진은 서 있거나 의자에 앉은 자세, 또는 옆으로 누어 있는 포즈도 찾아 볼 수 있다. 서 있는 포즈의 사진은 패션사진을 연상할 정도로 옷차림에 주의를 많이 기울였으며, 어색한 손 처리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서양식 의자나 탁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사진관이 아닌 기생들 자신의 주택에서 촬영할 경우에도 이러한 원칙은 충실하게 지켜졌다. 의상은 대부분 한복이었으며 사계절에 따라 다른 옷을 입도록 찍은 사진도 있다. 관기의 경우에는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무용수들이 입는 의상으로 촬영한 것이 일반 기생들의 사진과 다른 점이다. 앉아서 사진을 찍을 때는 장고나 거문고, 가야금 등을 타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게 하고 사진관이 아니 곳에서 촬영할 경우에는 병풍 등으로 배경 처리를 하거나 아니면 화려하게 치장한 기생들의 방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도 거울을 이용해 뒷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적인 사진들도 있었는데, 기생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했고 또 남성들 사회에서 관심이 컸던 만큼 이들의 사진 촬영 방법에 대한 연구도 많이 되어 있었으며, 다양한 포즈로 많은 사진들이 촬영되었다. 1920년대의 사진관에서는 기생이 중요한 고객이어서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사진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되고 또 기생 사진에 관련된 재미있는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특히 1920년대에 금광당 사진관을 종로 서린 동에 설립했던 김광배는 자신의 사진관이 기생사진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졌던 때의 일화를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들려준 적이 있다. 금광당 사진관에는 기생 고객이 제일 많았다. 그 때는 요릿집도 다니고 했는데, 우리가 돈을 내서 회원들을 대접하고, 또 경성사진사협회의 망년회라든지 무슨 행사가 있으면 요릿집에 모여 회의도 하고 여흥도 즐겼다. 경성사진사협회 제2회 정기총회를 하면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는데, 이 곳이 바로 명월관이라는 장안에서 이름난 요릿집이었다. 특히 사진관이 서린동, 명월관 지점 모퉁이에 있었고, 다동, 인사동에 있는 요릿집들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어, 기생들의 사진관 출입이 잦았다. 물론 사진도 마음에 들게 찍어주니까(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름답게 찍어준다는 것) 그렇기 하겠지만, 무상으로 와서 사진을 찍고, 돈은 주지 않고 영수증을 미납으로 해달라고 해서 가져간다. 가령 중판으로 한 장 찍으면 전지까지 확대를 부탁한다. 그리고 중판 대금과 전지 확대 대금까지 합하여 영수증을 해주면 그것을 가져갔다가, 사진이 완성될 무렵에 남자가 찾으러 온다. 기생에게 반한 사람이라, 사진을 찾아가야 다시 만나게 되니까 부탁하면 찾아다 줄 수밖에 없다. 기생들은 자기 돈 하나 내지 않고 사진을 찍고 찾을 수 있고, 나도 사진을 하나도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기생사진이라고 다른 사람 사진과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진을 찍으면 영수증을 미납으로 해주었다. 중판을 찍을 경우 전지까지 확대를 부탁한다. 그래서 중판 대금과 전지 확대 대금까지 합하여 영수증을 해주면 그것을 가져갔다가 사진이 완성될 때쯤이면 남자가 찾으러 온다. 사진을 찾으러 온 남자는 그 사진을 찍은 기생에게 반한 남자로, 이것을 찾아야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찾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생들은 자기가 돈 하나 내지 않고 사진을 찾을 수 있었고, 그리고 나도 기생 사진은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워낙 화류계 여성들이 많이 들랑날랑 하니까 금광당은 기생 사진관이란 말도 들었다. 기생들은 권번에 속했다. 네 개의 권번(券番)이 있었는데, 모든 권번의 기생들을 고객으로 독점하자 사진사들 중에 불만을 가진 동업자들도 있었다. 시비가 붙었는데 부인 사진관 주인 채상묵이 술을 한 병 가지고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 온 적이 있었다. 기생 고객을 당신만 전부 독차지하면 우리는 어떻게 사진관을 운영하느냐고 술병을 깨뜨리면서 렌즈를 먹고 죽겠다고 폭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
기생 사진은 우리 사진 미학에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패션 스타일의 사진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여성 사진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생 사진은 사진 미학 이전에 여성 해방을 사진으로 실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법률적인 문제나 관습법을 타파하는데 사진이 앞장섰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사진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의 표방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으며, 3,1만세 운동 때처럼 모든 여성의 의식을 뛰어 넘어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자신을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했다는 것은 여성이 남성들과 함께 동등한 지위를 사진 속에서 누릴 수 있다는 적극적인 노력의 표시이기도 한 것이었다. 기생 사진은 이러한 관심과 함께 자신들이나 이것을 보고 싶어 하는 남성들이 많아지면서 새로운사회 문제도 대두되었다. 그 것은 누드사진 또는 외설스런 사진들이 사회 문제를 야기하면서 법률적인 제약을 초래한 것이었다. 1909년 법률 제6호로 제정된 출판법에 이어 신문지법, 보안법, 경찰범 처벌 규칙, 그리고 1936년 이후부터 실시한 신문 검열에 의하면 예술적인 측면은 용인하지 않는 대신 풍속을 괴란 시키는 누드는 엄격하게 규제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도는 풍속을 괴란 하는 문서, 도화를 출판하는 때는 10개월 이하의 금옥」 「음부를 노출시킨 사진, 회화, 그림 엽서의 류」,「음부를 노출치 않았거나 추악 도발적으로 표현된 나체 사진, 회화, 그림, 엽서의 류」 여성을 사진으로 표현하는데 법률적인 허용의 한계는 정치권력에 따라 자의적으로 시행해 왔다. 특히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풍속을 해친다는 명분에서 여성을 사진으로 표현하는데 심하게 규제를 했던 것은 위의 법률적인 명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예술사진 운동에서 여성 사진의 파격적인 작품화가 일어지지 못한 대신, 춘화 같은 여성 사진이 비밀리에 거래되는 파행적인 사회 상황을 만들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 여성사진사(史) - 천연당사진관의 여성 사진사 향원당>
여성은 시대의 변천과는 관계없이 사진 예술 표현에서 영원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을 상대로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대 환경의 변화와 함께 사진가들의 개척 정신도 한 몫을 했다. 우리의 사진 도입기에 해당되는 1880년대 무렵만 해도 남성 사진사들이 여성을 카메라 앞에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했다. 내외 법으로 남성 사진사들 앞에 얼굴을 들어내지 못하는 인구의 절반이 넘는 여성 고객은 사진이라는 문화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1890년, 193,136명의 서울 총 인구 가운데 여성 인구가 98,767명을 차지했으며, 전국의 총인구 6,607,604명 가운데 여성 인구는 3,271,018명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당시에 개업하고 있던 많은 사진관에서는 남성 인구에 버금가는 잠재된 여성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했으나 전통적으로 여성들을 지배해 온 내외법을 넘어설 수 는 없었다. 내외법은 이런 것이었다. 여자가 남자와 대면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 행위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부득이 외출할 때는 일몰 후인 8시에서 10시 사이에 사람이 뜸한 시간을 이용하도록 했으며, 장옷을 쓰거나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다. 네 살만 되면 어머니 등에 업혀서도 천의(쓰개치마의 일종)를 써야 바깥출입이 가능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 그대로 일곱 살이 되기 이전부터 내외법의 적용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다. 여자는 남의 집 남자와 말할 때 문을 열고 말하면 불칙한 여자라고 해서 문을 닫고 방안에서 얘기를 해야 했다. 사회적 접촉이나 활동은 생각도 할 수 없었으며, 남자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여받을 수 없기 때문에 결혼해서도 아버지의 성을 따라 무슨무슨 씨 부인이라고만 했다. 내외 법으로 남성 사진사들에게 포즈를 취할 수 없는 전국의 전체 인구 6백 6십 여만 명의 인구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3백 2십여만 명의 여성들은 엄청난 잠재된 고객이었다. 사진사들은 남성과 관습법으로 격리되어 있는 여성들을 사진관으로 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안했다. 1903년 서울 남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던 생영관(生影 )의 이와다(岩田鼎)라는 일본인 사진사는 황성신문에 "부인사진을 찍을 때는 여사진사가 촬영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했는데, 아마 이 때부터 여성들의 사진촬영을 위한 여러 대책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별사진 광고
금(今)에 별대본(別大本) 기계(器械)가 신도(新到)하였사오니 첨군자(僉君子)는 내임(來臨)하시압. 부인(婦人) 백히는 시(時)는 여사진사(女寫眞師)가 백이오.
경성 생영관, 경성 남산 하, 사진사 암전경(岩田鼎)

부인사진사를 내세웠던 생영관 사진사 이와다는 1902년 1월 7일자에 낸 황성신문 광고에, 자신이 일본 궁내성 어용사진사 마루키(丸木利陽)의 사진관에서 10여 년간 기술 주임으로 근무한 경력과 새로 개축한 촬영장 소개, 그리고 만세 불변색 사진, 미술사진, 백금사진 등 고급 인화를 조제품으로 열거해 실력 있는 사진사임을 내세웠다. 그러아 앞에 광고한 여사진사에 대해서는 그 후에 낸 신문 광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부인사진사를 내세웠던 일련의 상술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 후의 새로운 광고를 찾을 수 없었다. 1907년 문을 연 천연당사진관은 개업 당시부터 여성 고객들을 유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일본인 사진관 생영관처럼 처음부터 부인사진사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의 편의를 위하여 내당, 즉 내실로 출입케 해 남성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도록 하고 부인이 촬영하는 방안을 마련해, 이러한 내용을 광고에 삽입하고 있다.

천연당사진
특별 염가 불변색
부인은 내당에서 부인이 촬(撮)하고 출입이 심편(甚便)함
황단하 석정동 11통 5호, 김규진

여성 고객들을 사진관에 유치하기 위해 가장 참신한 아이디어로 여성이 여성의 사진을 찍는 부인사진사를 등장시켜 여성만을 사진 찍게 한다는 것이었다. 관습의 굴레를 관습으로 해결한다는 간단한 생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는 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운영하는 천연당사진관의 광고를 게재했는데, 그 내용 중에 "부인사진은 여인이 백히오니 사진 백히기를원하는 부인네는 본당으로 왕림 면의 하시옵" 이란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를 광고한 사람은 부인사진사 향원당(香園堂)이라는 여성이었다.

「포덕문 밖 신작로 변 김규진 집에 천연당사진관을 건설하고 부인네 사진을 백히옵는데 값도 저렴하고 사진 또한 정교하며 내외 엄숙하고 부인 사진은 여인이 백히오니 사진 백히기 원하시는 부인네는 본당에 왕림 면의 하시옵. 부인 사진사 향원당 고백」

그 후에도 향원당의 이름으로 광고를 게재하지 않았지만 부인사진사가 부인들을 담당해 사진을 찍는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는데, 광고를 통해 많은 여성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 같다. 천연당 사진관에서 내세웠던최초의 부인사진사는 향원당이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그리고 최초로 여자 전용 촬영장도 개설해 운영했다. 최초로 여성 고객을 카메라 앞으로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것 같다. 당시의 신문에는 이러한 시민들의 반응을,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대기실과 촬영장을 따로 만들어 놓았으며, 촬영할 때도 남성은 일절 출입이 금지된 상태에서 부인사진사가 부인 사진을 찍는다는 내용과 남편이 부인을 동반한 고객들도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화제 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전 시종(侍從) 김규진씨 천연당 사진관을 개설 영업한 사(事)는 전보(前報)에 기게(己揭)어니 와 비단 염가술교(廉價術巧)라 내빈외객의 촬영 처소를 각설하고 부인 촬영 시에는 부인이 환술(幻術)하여 남인은 일절부득 출입하니 내외 엄숙한 고로 근일에 부인 촬영자와 내외 병탑자(幷搭者)가 일일 답지한다더라」

천연당 사진관은 여성 사진사를 등장시키므로 해서 잠재된 여성 고객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여성이 여성을 사진 찍는다는 선전도 효과가 있었지만, 남자를 출입시키지 않는 장소를 마련해, 내외법을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여성들을 움직이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여성들은 하나 둘 씩 사진관을 찾아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부인들은 남편을 동반하고 여성사진사를 통해 사진문화에 대한 접촉을 실현했다. 여성 최초의 사진사인 향원당은 내외법이 상존 하던 시대에 여성들을 카메라 앞에 서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개인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 또 여성으로 얼마만큼의 실력을 가진 사진사였는지, 이에 관한 기록도 찾아 볼 수 없다. 내외가 심한 시대에 여성들이 사진관에서 장옷을 벗고 카메라 앞에 나설 수 있는 역할에 한정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인화나 수정 등을 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사진사였는지, 현재로서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밝힐 수는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독자들의 도움을 바란다.

<사진관을 개업한 여성사진사>
1910년대에는 여성만을 촬영하는 사진사가 아니라 성의 구별 없이 사진관을 직접 운영하면서 능력을 발휘했던 전문 여성 사진사가 등장해 신문에 뉴스의 인물로 소개된 적도 있었다. 이홍경(李弘敬)이라는 여성사진사로,그가 촬영 술과 수정술 등 전문적인 실력을 구비한 최초의 여성사진사였다. 1919년 남편과 함께 서울 인사 동에 경성사진관을 개업, 여성사진사로활약하기 시작했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고객들도 그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홍경은 여성들이사진관을 이용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했던 초기의 여성 사진사 역할이 아니라 사진관을 남편과 함께 직접 운영, 촬영 술과 인화술, 그리고 수정까지 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1927년 5월18일 조선일보는 이 날짜 신문에 "조선 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이란 연재물에 여자사진사로 이홍경을 소개했는데, 꼼꼼한 여성이 택한 사진사라는 직업은 남성보다 훨씬 더 적합하다고 그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적인 기술을요하는 것이니, 제일 두뇌가 영민하여 배경을 잘 보며 성품이 꼼꼼하여 수정을 잘 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점에서 보던지 사진사는 남자보다도 여자에게 적당한 직업이라 할 수 있으며 더욱이 아직도 내외가 심한 구가정의 새 아씨나 규수들의 촬영은 반드시 여자 사진사를 요구할 것이 옳시다..」

이홍경은 여류사진사로 활동하는 한편 근화여학교에서 사진부를 만들어 여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여학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활동은 여성에 대한 폐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진위적이고 활동적인 길을 열었으며 사진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그 속에 스며있었다. 사진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했던 이홍경은 사진에 대해 다양성을 갖지는 못했다. 사진사라는 범위에서 사진을 이해했으며, 사진관을 중심으로 해서 사진술의 기초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조선일보의 기사에도 잘 나타나있는데 그럼에도 사진사로서의 사명감과 성실성에 대한 그의 의식은 우리를 공감케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진이라는 것은 첫째로 배경과인물의 표정을 잘 주의하여야 할 것인 고로 이것이 무엇보다도 큰 고심을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거니와 그보다도 박히어 가지고 수정을 잘하지 모사면 그 사진의 생명은 죽어버리는 터이므로 사진사들의 모든 정력을 여기에 소비하게 되며 따라서 마음이 매우 침착한 사람이 아니면 우량한 성적을 얻기 어려울 것이요 아무 고장 없이 수정까지 잘하여 놓았다할지라도 어디서 무슨 병이 생겼든지 판에 부치어 두었다보면 흠집이 생기고 꺼뭇꺼뭇하거나 누릇누릇한 점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접에 각별 주의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진 영업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때를 당하는 것은 흠 없이 잘 만들어둔 줄 알았다가 찾으러오는 사람에게 내어주려 할 제 다시 열어보면 의외로 고장이 드러나는 것이니 구멍이라도 있으면 온몸을 쑥 드러보내여 그대로 숨어지고 싶은 생각까지도 난답니다.」

이홍경은 이후 관철동에 조선 부인사진관을 개업하고., 낸 광고에서 이전에는 부인사진을 촬영할 때는 내외가 심한 사화 형편에서는 여성 사진사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신사숙녀를 대상으로 예술적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의욕적인 포부를 피력했다.

개업광고
신문화를 건설하며 새 사업을 이루려는 우리 사회에 오직 그 요소인 예술적 관념이 결핍하옴은 우리의 항상 감탄하는 바인 줄로 생각하와 본인이 이에 다년 연구하온 결과 금춘을 기하여 좌기 장소에 초상과 및 사진업을 개(開)하옵고 삼천이백 촉(燭)의 전기를 응용하와 정선(精鮮)한 기술로써 요구하시는 대로 수응하겠삽기에 광고하오니 사해(四海) 신사숙녀 제위는 여자 사업계에 첫걸음임을 널리 애고찬동(愛顧讚同)하시어 일차 시험하여 주심을 업대여 바라나이다.
경성부 관철동 75번지 조선부인사진관 주 이홍경
이홍경이 사진사로 활동했던 시기에는 구 가정의 새 아씨나 규수들은 남성들을 기피하고 여자 사진사들 앞에서만 사진 찍기를 원하던, 내외법이 잔존해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그는 여성으로 사진사라는 새로운 직업에 도전했으며, 여성들에게 사진 문화를 접촉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여성이 여성과 남성을 다 카메라 앞에 새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를 뛰어 넘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기사에도 드러나 있는 것처럼 사진사로서의 성실성과 고객을 위한 마음씨는 우리를 공감케 해 주는 부분이다. 이후 여성 사진사는 자생적인 과정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등장하게 되었다. YMCA 사진과나 경성 사진학 강습원, 그리고 야간 속성 사진학교 등은 남성들과 함께 여성들이 사진사로 진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풀어야 할 명성황후 사진에 대해>
사진의 내용은 사진 속에서 찾아진다는 간단한 말이 있다. 이 말은 사진을 설명하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명성 황후라고 하는 사진에 대해, 이 분야의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간에 한 번쯤은 의사 표시를 할 정도로 역사학자, 신문사 논설고문, 복식사가, 정치학자, 신부, 외교학자, 기타 많은 전문가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왔다.
어느 때부터인가 무색 배경에서 찍힌 모습을 명성황후라고 교과서에 게재되어 왔는데, 1997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대례복 차림의 왕비"라는 설명이 붙은 주한 이탈리아공사였던 까를로 로베티의 꼬레아 꼬레아니 (1904년)에 실린 사진이 명성황후의 참 모습이라고 주장하면서,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이교수의 주장은 고종의 서재 겸 집무실인 경복궁 집옥재가 명성황후의 촬영 장소일고 또한머리 장식을 보아도 황후임에 틀림없다는 것이고,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 (1906)에 실린 궁녀라고 한 사진의 배경은 일제가 고의로 지운 것이라고 했다.
이와는 반대로 조선일보 이규태 논설고문은, 머리 모양에 대해 사진 속의 머리모양은 이여머리로 궁중에서 국혼 등 대례가 있을 때 비나 공주를 비롯한 귀족들 사이에 하는 머리 모양이고, 왕비도 이여머리를 하지만 장식이 더 화려한 대수머리를 하는 것이 관례이며, 영친왕비도 순종을알현할 때 대수머리를 했다는 것이며, 이로 보건대, 이 교수가 주장하는 사진은 명성황후라기 보다는 예복 차림의 궁녀를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또 사진 배경에 대해서도, 왼편에 수실 끈이 늘어진 서양 커튼이 처 있고 그 뒤로 책장이 보이는데, 이러한 배경은 역시 로베티의 다른 사진들, "기생의 의복 한 벌"이란 사진과 동일한 배경으로, 기생 옷을 놓은 의자에 왕후를 앉혀 사진을 찍지 않았을 거시라는 주장, 그리고, 의사에게 진맥을 할 때에도 손목에 실을 감고 진맥 받았을 정도로 내외를 엄격히 지켰던 황후가 외간 남자가 조종하는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반론이었다.
이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다시, 기존의 명성황후라고 했던 사진은 기생 옷을 포함한 기생 사진 몇 장과 함께 "황제와 그의 궁정" 편에서 궁중 음악과 춤을 소개한 부분에 실렸는데. 궁중행사 때 여기들의 옷과 왕비가 같은 자리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중요 쟁점으로 거론 되었던 것은 머리 모양과 복식, 그리고 사진 속의 여성의 성격이나 표정 당시대의 관습, 그리고 이들 사진을 게재한 작가들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서술하는 부분에 이 사진을 게재했다는 점 등을 진위 여부의 증거로 제시 했다.
과연 명성황후 사진은 세상에 찬반양론으로 갈라져 있는 모습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정말 명성황후의 사진은 존재하는 것인가. 그러면 어떤 사진이 명성황후의 진영일까 등에 대한 해답은 돌출해 내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말았다. 왜하면 우리가 단 한 장의 사진에 매달려 그것을 명성황후 사진이라고 하고 또 아니라고 하는 한, 진실은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명성황후라고 하는 사진과 같은 모습을 게재한 책들을 리뷰를 해보자.
명성황후라고 주장하는 사진을 독일의 카톨릭 전교회지 1895년 9월호에는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목판으로 인쇄한 사진을 게재했는데, 사진 설명은 "조선 여인" 이었다. 1895년 호주에서 발행된 영국 외교관 가드너의 저서 조선 에도 명성황후 사진이라고 하는 것과 거의 같은 삽화을 게재 했는데 사진 설명은 "궁복을 입고 있는 조선 여인" 라고 되어 있다. "궁복을 입고 있는 조선 여인"이라는 삽화를 게재한 '조선의 저자 가드너는 황후 시해 1년 전인 1894년까지 영국 총영사 직무대리로있으면서 국내 상황에도 정통했는데, 이 삽화 하단에 '조선 여인들은 대체로 커다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지만 궁녀들은 이보다 훨씬 더 큰 가발로 치장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금속 핀을 꽂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두 점의삽화는 1895년 무렵에 인쇄된 것들 중에 지금까지 공개된 명성황후 사진이라고 하는 사진들과 비교할 때 가장 이른 시기에 발표된 자료다. 이후에 이 사진의 게재는 계속되는데, 명성 황후라는 설명도 있고, 귀부인, 궁녀 등의 설명도 있다.
프랑스 아장의 기행문에는 "시해된 대한제국 황후"로, 1898년 프랑스 특파원 드라게리의 조선 ,에는 "조선의 여왕"으로, 프랑스 신부 아드리앙 로네 조선과 프랑스 선교사에는 "조선 여인"으로, 프랑스어 학교 교사 알레벡끄의 사진 엽서에는 "예복을 입은 궁중 여인"으로 헐버트 대한제국의 멸망 에는 "정장 차림의 조선 여인"으로 이탈리아 외교관 로제티 꼬레아 꼬리아니 에는 "궁중 여인"으로, 스웨덴 신문기자 아손 크렙스트 조선 에는 "나인"으로, 언더우드 여사 조선에서의 토미 톰킨스 에서는 "정장 차림의 여인" 등으로 게재된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명성황후 사진과 관련해, 황후에 대해서는 여러 속설이 있어 왔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살해될 번했던 했으나, 왕비로 위장한 시녀가 대신 죽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해, 그 후부터는 평상시에도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설. 여의사로 명성황후를 자주 진료했던 언더우드여사는 측근이나 시녀들이 과민할 정도로 왕비를 보호했다고 했으며, 궁중 의사였던 알렌도 황후를 직접 진료한 적이 있는데, 전의들이 진맥한 것처럼, 발로 가리고 팔만 내밀어, 그것도 팔목 한 치 정도만 노출되었으며, 혀도 발 틈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는 기록. 직접 만났던 서양인들의 명성황후에 대한 인상은, 역시 명성황후를 자주 진료했던 언더우드여사는 상투와 함께 한 15년 에서 "왕비를 대면한다는 것은 가장 큰 관심사로서 자못 흥분되었다. 갸름하며 약간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도 반짝이는 총명스런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시선을 끄는 미모는 아니었으나 용모에서 풍기는 지적이고 예리함이 상대방을 압도했다. 외모와는 달리 대화시에는 밝은 표정을 지었으며,명료하고 우아하며 재치가 넘치는 모습으로 호감을 주었다."고 기록했으며,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한국에 왔던 이사벨라 비숍여사는 "약간 창백한 듯한 얼굴에 몸매는 마른 편이고 날카로운 용모에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는 아름답다기보다 강한 개성을 엿볼 수 있다"라고 그이 책 한국과 그 이웃 나라 에 기록했다.
이러한 여러 사실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명성황후는 측근이나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잇는 사람이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했고, 또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상화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 않을까. 그럼에도 명성황후 사후, 고종이나 조선 황실에서 황후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고 찾았는데, 이것은 명성 황후 생전에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명성황후 사진은 시해 이전부터 "궁중 여인"으로 서양 외교관들 사이에 공개적으로 알려졌던 사진이고 보면 또 다른 명성황후의 사진이 있지 않을까. 이러 한 측면에서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명성황후 사진에 대해, 진짜 모습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미리 단정하지 않고, 사진에 나타난 여러 현상들, 촬영장, 소도구, 배경, 카메라 앵글, 그리고 배경이 없는 사진과 배경이 있는 사진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시 배경을 만들어 찍었는가 등, 사진 분야에서 검토할 수 여러 문재들을 처음으로 검토해 보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지금까지는 논의 과정에서 사진을 분석하고, 사진 속이 나타나 있는 숨은 열쇄를 찾으려는 시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가의 의견을 들으려하는 논쟁가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