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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사진 워크샵 <여성은 자연과, 생명과 행복하게 만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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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owpa 작성일06-06-27 18:12 조회2,2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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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사진 워크샵<여성은 자연과, 생명과 행복하게 만나는가?>

일시:2003년 5월 24일(토:오후3시~)
주제:여성은 자연과, 생명과 행복하게 만나는가?
강사:김영옥 (문화평론가,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1. 작가는 비밀에 익숙한 사람이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 - 죽음, 가난,타인의 고통, 욕망 등 비밀스런 존재에 다가서는 섬뜩한 발걸음. 작가는 비밀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것을 죽음의 비망록에 넘겨준다. 죽음에 봉사하는 사람들 (사진작가는 아니지만 예를 들어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을 남긴 케테 콜비츠의 판화는 여성적 숭고함으로 이것을 포착해내고 있다.


2.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서 - 삶을 죽음으로 전환시키는 사진은 얼리고 냉동시키며, 살균시키는, 그리하여 진정한 죽음과 삶 모두에서 떼어놓는 시뮬라크르들의 현대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모든 사진들에는 죽음에의 회귀라는 조금은 무시무시한 느낌이 담겨져 있다. ... 나는 내가 보여지는 모습과 다른 곳에 존재한다. 요컨대 나는 상황과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 수많은 사진들 사이에서 동요하고, 변화하는 나의 이미지가 언제나 (소위 심오한) 나의 '자아'와 일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자아'와 나의 이미지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무겁고, 변화하지 않으며, 경직되어 있으나 (바로 이점 때문에 사회가 이미지에 의존한다), '자아'는 가볍고, 분열되고, 산만하며 또 잠수 인형처럼 어항 속에서 흔들거리면서 느긋하게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뜨)


"더 이상 실재와 교환되어지지 않는, 어느 곳에서도 지시나 테두리를 발견할 수 없는 끝없는 순환 속에서 그 자체로 교환되어지는 시뮬라크르. ... 재현은 기호와 실재의 등강 원칙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는 등가 원칙의 유토피아를 거꾸로 하여 가치로서의 기호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죽어버린 다름들의 그늘 아래에서, 그리고 다름들의 부활의 그늘 아래에서 이미지는 다음과 같이 변모한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선량한 외양 / 신성의 계열)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나쁜 외양 / 저주의 계열)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가 외양으로 연출됨 / 마법의 계열)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즉 이미지는 자기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외양이 아닌 시뮬라시옹의 계열)" (장 보들리야르)


(예: '플라스틱'의 세계)
3. 기호들의 세계와 은유의 세계에서 여성의 몸은?
- 서구의 형이상학에서 '자연'이 해석되어 온 방식에 유념하기. 그리고 탈근대의 맥락에서 몸이 중요해진 이유를 함께 성찰하기
- 물과 여성의 몸은 항상 신화적인, 은유적인 연관망 속에서 해석되었다. 즉 그리움과 유혹, 욕망과 공포, 사랑과 죽음을 함께 내포한다. (참조: 물의 요정 모티프 - 사이렌, 비너스의 탄생, 욕조에 누운 여인)
- 그러나 더 나아가 물과 '흐르는 것'은 위험한 범람, 파괴, 오명, 남성의 '통제가능한 자아'를 통제불가능하게 뒤흔드는 성적 욕망의 연쇄고리를 거쳐 모든 낯선 것들, 그리고 타자성을 가리키는 기표가 되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테베라이트의 '남성 판타지' 참조)
- 또한 여성은 역사철학적 시간 밖에 있는 '자연'으로 위치지어짐으로써 역사철학적 시간과 그 안에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소위 외부적 구성요인으로 작동해왔다. 정신/역사/변화 대 육체/자연/불변으로 날카롭게 구분된 이분법적 세계관 속에서 여성은 항상 육체와 자연을 담당하는 자리에 서게 됨으로써 주체적 실존을 빼앗긴 채 기표로 떠돌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연/육체/여성/생명을 재정의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 여기서 궁극적으로 남겨지는 질문은 '과연 여성의 몸은 그 누구의 몸보다 더 '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보다더 많은 이야기거리를 담고/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보다 더 문명화되고 문화적으로 가공된 몸이다. 더 견고하게 문화산업의 교환회로에 갇힌 몸이다.따라서 여성의 몸에 대한 성찰은, 노동과 문화와, 섹슈얼리티 그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정황에 대한 복잡다단한 비판적 거리두기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4. 변화하는, 진행 중에 있는 개념으로서의 '자연', '몸'
(예: '인공 수정'과 출산하는 여성의 육체, 탄생한 생명의 자아 정체성)
'환경친화적'이란 말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환경'은 무엇인가? 예컨대 '동양에서는 인간이 늘 자연의 일부였다'라는 말은 일종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허다한 동양화 속에서 깊은 산 속, 그 현묘함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은 모두 남성들이다. 화가 자신을 대변하는 이러한 남성들은 예술을 완성시키며 동시에 자연의 품에서 다시 환생하기를 희망한다. 식민화의 에로키시즘과 풍수지리설에 뵤여주듯 여성은 늘 남성주체의 환생 소망을 위한 대지/자연/자궁이었다. 여기에 대해 여성들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5. '생명'을 다시 생각하기
나는 여기서 '타자의 윤리학'으로 이해된 생명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인간은 타자의 시선 속에 던져진 존재이다. '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완성되는 내 삶의 이야기'에 대한 인식은 생명에 대한 어떤 윤리학적 열림을 가능케 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 / Carverera) (예: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6. 표현의 문제
- 소재를 떠나 형식으로 헨리 무어의 '손'을 비롯한 조각들은 어머니와 모성을 일화나 환경 등의 세부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만지고 만져지는 특별한 방식에 대한 환기를 통해서' 표현한다.


<함께 생각하기:몇몇 여성 사진 작가들의 작품에서 드러난 여성의 몸: 실증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현재성과 사라짐 사이에서 현존/부재하는, 구체성과 추상성 사이에서 존재하는 여성 몸의 형상화>


1. 프란체스카 우드먼 (Francesca Woodman)
- 유령 같은, 그리고 사라져가는 현존을 보게 하는 그녀의 사진들. 사지 절단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조각난 몸의 폭력적 평온을 암시. 불안정한 어떤 지점, 정체성이 주변에 통합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찢어지기 쉬운 막 - 현존하면서 추락하는 여성의 실존.
2. 애나 멘디에타 (Ana Mendieta) - 자신의 몸을 통해 대지와 하나됨을 추구하는 그녀의 연행 / 사진들, '실루에타 Siluetas' 연작에서 그녀의 몸은 자연과 융합되며 자궁 및 무덤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사진 작가이자 연행 예술가인 그녀는 흔적으로서의 여성의 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자신의 그림자에 기반해 풍경과 여성의 몸 사이의 대화를 진행시킨다. 나는 이것이 사춘기 시절 고향 쿠바에서 떨어져 나온 경험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궁 (자연)에서 추방당했던 감정에 압도당한다. 내 예술은 ... 모성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3. 박영숙
- '제 3 공간'에 걸려있는 그녀의 사진 중 한 연작은 마녀의 사냥이 있었던 '자리'를 불안과 위협의 유령적 공간으로 포착한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흔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태의 형태로 여전히 진행 중인 어떤 공포와 위협, 그리고 그 속에서 언제라도 타율적인 사라짐을 경험할 수도 있는 여성의 신체를 '기억'한다.


4. 신디 셔먼 (스틸 사진들)
- 카메라 앞에 선 나는 어떤 주체일 수 있는가 (포즈를 취하는 여성, 카메라를 잡은 여성)를 질문하는 그녀의 사진들은 gaze의 대상화, 사물화, 기록적 화석화 작용에 대한 명백한 실험이다. 사진이 찍히기도 전에 이미 주어진 특정한 형태로 포즈를 잡는 여성, gaze 앞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이상적 이미지'를 열망하는 주체. 우리는 그러나 이러한 주체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불완전한 타자성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대안적 시선(look)의 주체행위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카자 실버만).


5. 마케타 루스카코바 ('잠든 순례자')
- 죽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녀의 사진들은 '산 자의 시선으로 포착한 죽은 자에 관한 르포르타쥬'이다. 산 자들의 생활 한가운데 있는 죽은 자들의 존재. 가장 친밀한 순간에 찍힌 사람들. 우리는 가장 친밀한 순간에 찍힌 그들을 보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 있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이웃, 즉 죽은 자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과 더불어 '다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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